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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일상다반사

정조의 일기 '일성록' 정조 즉위년 병신(1776) 3월 7일(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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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07[01] 약원(樂院)이 구전으로 달하여 미음을 들기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 약방이 구전으로 달하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저하께서 감정을 추스리지 않은 채 곡읍(哭泣)만 하시고 전혀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십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중궁전과 혜빈궁의 슬픔이 망극하시어 필시 손상이 많을 것입니다. 실로 타는 듯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이에 감히 녹두죽(綠豆粥)을 올리니, 슬픔을 억제하시고 애써 드시도록 하시는 한편, 이어서 중궁전과 혜빈궁에도 드시도록 권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망극하다는 뜻으로 어제 이미 유시하였다.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중궁전과 혜빈궁에는 권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00-03-07[02]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서 달하여 사위(嗣位)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영중추부사 김상복(金相福), 판중추부사 김양택(金陽澤)ㆍ한익모(韓翼謨),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좌의정 신회(申晦), 우의정 이은(李溵)이다.

○ 김상복 등이 달하기를,

“제왕(帝王)의 효도는 왕위를 계승하여 대통을 이어받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막중함이 종묘 사직에 있는데다 의리가 그 슬픔을 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가 망극한 슬픔을 조금 억제하시고 속히 유사의 청을 따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또 왜들 이러는가.”

하였다.

○ 재차 달하여, 답하기를,

“경들은 또 왜들 이러는가. 망극할 뿐이다.”

하였다.

○ 세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가슴이 무너지는 듯할 뿐이다.”

하였다.

○ 네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무너지는 듯한 마음이 망극하니, 경들은 다시는 나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다섯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왜들 이러는가.”

하였다.

00-03-07[03] 원의(院議)로 달하여 사위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승지 서유린(徐有隣), 채홍리(蔡弘履), 서유경(徐有慶), 오재소(吳載紹), 김문순(金文淳), 이양정(李養鼎)이다.

○ 원의로 달하기를,

“이 대례(大禮)는 고금을 통해 바꿀 수 없는 상전(常典)입니다. 저하의 하늘에 달하는 효성으로 어찌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버이를 대신하는 애통함은 비록 차마하지 못할 것이 있지만 왕통을 계승하는 일은 실로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삼가 청컨대, 속히 윤허하여 따르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미 대궐 뜰에서 달하였을 때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 재차 달하여, 답하기를,

“부원(府院)이 달하였을 때에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 세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이미 정청(庭請)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 네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이미 정청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 다섯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이미 정청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00-03-07[04] 양사(兩司)가 합사(合辭)로 달하여 사위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대사헌 조재준(趙載俊), 대사간 이석재(李碩載), 집의 김낙수(金樂洙), 장령 신흔(申昕)ㆍ이창한(李昌漢), 지평 심기태(沈基泰), 헌납 이평(李枰)이다.

○ 합사(合辭)로 달하기를,

“천위(天位)는 잠시도 비워 둘 수 없는 것인데, 저하께서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계신 지가 벌써 며칠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인(聖人)이 뜻을 계승하고 일을 이어받는 처사라 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막중한 위임을 받드는 처사라 하겠습니까. 속히 신들의 청을 윤허하셔서 한 나라의 소망에 부응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대궐 뜰에서 달하였을 때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 재차 달하여, 답하기를,

“대궐 뜰에서 달하였을 때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 세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이미 정원(政院)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 네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이미 정원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 다섯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이미 정청(庭請)에 답하였다.”

하였다.

00-03-07[05] 옥당이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려 사위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교리 정우순(鄭宇淳), 부교리 박천형(朴天衡)ㆍ조상진(趙尙鎭), 수찬 윤동만(尹東晚)ㆍ김치현(金致顯), 부수찬 윤행수(尹行修)이다.

○ 연명 차자의 대략에,

“돌아보건대, 우리 대행 대왕께서 4백 년 동안 지켜 온 종묘 사직의 막중함을 넘겨 준 분이 바로 우리 저하이신데, 저하께서는 이를 계승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팔도의 백성들이 달려와 호곡(號哭)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추대하기를 원하는 분은 오직 저하이신데, 저하께서 그들을 위로하고 답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신들이 올리는 말은 바로 온 나라가 다 같이 느끼는 정서입니다. 삼가 청컨대, 속히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미 정원이 달하였을 때 유시하였다.”

하였다.

○ 재차 차자를 올려, 답하기를,

“이미 부원(府院)에 답하였다.”

하였다.

○ 세 번째 차자를 올려, 답하기를,

“양사에 답하였다.”

하였다.

00-03-07[06] 집경당(集慶堂)에서 원상(院相) 이하를 인접(引接)하였다. 원상 김상철(金尙喆), 총호사 신회(申晦),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공조 판서 김한기(金漢耆), 부사직 김효대(金孝大)이다.

○ 종척(宗戚)의 집사 박명원 등이 견양(見樣)을 다시 내기를 청하니, 따랐다. 박명원 등이 어상(御牀) 곁으로 들어가서 견양을 냈다. - 안쪽 길이는 6척이고, 안쪽 너비는 1척 7촌 1푼이고, 높이가 1척 8푼이었다. - 내가 이르기를,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의 찬수(纂修)를 늦추어서는 안 되니, 당상과 낭청을 속히 차출하는 것이 좋겠다. 대행조(大行朝) 50년 동안의 성덕(盛德)과 지치(至治)에 대한 것이야 이미 금궤(金櫃)와 석실(石室)에 보관되어 있거니와, 저위(儲位)에 오르기 이전의 그윽한 덕과 미처 드러나지 않은 집안에서의 행실 가운데에도 역시 사실대로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많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슬프고 경황이 없는 중이라서 정신이 흐릿하여 기록해 낼 수가 없다. 더구나 선대왕의 지극히 자애롭고 우애 있던 덕은 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 경종2)의 어려운 시기에 드러났으니, 그러한 것을 만분의 일이나마 찬양하여 성덕(聖德)을 빛내야 할 것이다.”

하니, 김상철이 아뢰기를,

“서둘러 찬수한 다음에야 시장(諡狀)을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찬수할 당상과 낭청을 즉시 차출하라.”

하니, 김상철이 아뢰기를,

“교정 낭청(校正郎廳)은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 서유방(徐有防), 이진형(李鎭衡)을 차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그게 좋겠다. 당상은 일찍이 편차(編次)를 해 본 사람을 차출하는 것이 좋으니, 채제공(蔡濟恭)이나 구윤명(具允明)이라면 더욱 좋겠다. 조명정(趙明鼎)은 찬수 당상(纂修堂上)으로 차하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철이 아뢰기를,

“호조 판서는 현재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맡고 있는데, 또 교정하는 일을 보게 되면 방해될 소지가 있을 듯합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도감 당상이 이 한 사람만이 아니니, 비록 교정하는 일을 보더라도 어찌 크게 방해될 염려가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대행 대왕의 행장을 이제 찬수할 것인데, 《정원일기(政院日記)》 이외에 일상 생활할 때의 행동이나 일일지라도 만일 성덕을 표출할 만한 것이 있다면 신하들은 각각 기록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윤동철(尹東哲)은 입대(入對)하라.”

하니, 윤동철이 나와 부복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아까 이미 영을 내렸다만 이제 행장의 초고를 찬수하려고 하니, 드러낼 만한 성덕에 대해서는 경들이 일일이 기록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정후겸(鄭厚謙)은 입대(入對)하라.”

하니, 정후겸이 나와 부복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대행조(大行朝)의 시장(諡狀)을 곧 들여보내야 할 것인데, 나는 혼미한 상황이라 만분의 일도 기억할 수가 없다. 비록 한두 가지라도 경이 만약 생각나는 바가 있으면 역사 기록에 실려 있거나 사람들이 다 아는 것 이외의 것이라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니, 정후겸이 아뢰기를,

“신이 어떻게 한두 가지 사건으로 성덕을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금성위(錦城尉)와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도승지는 입대하라.”

하니, 서유린(徐有隣)이 나와 부복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이번 집사 중에 최동악(崔東岳)의 집안에서는 한 사람도 들어와 참여한 자가 없으니, 만일 집사를 감당할 만한 자가 있거든 이름을 알아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서유린이 아뢰기를,

“최씨(崔氏)들은 다 외임으로 있고 서울에 있는 자는 단지 한 사람뿐인데, 그는 자질이 낮아서 집사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그 인척 중에 혹시 합당한 자가 있거든 기록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대행조의 언행 가운데 금궤와 석실에 보관해 둔 것 외에 혹시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행실이라도 입시해서 들은 것이 있거나 외부에 전파된 것이 있거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은 들은 대로 기록해서 들이라고 원상(院相)에게 말하라.”

하였다. 서유린이 아뢰기를,

“신이 나가서 최가(崔家)의 인척을 물어 보니, 다만 조덕륜(趙德倫)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이 사람 역시 집사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우선 합문(閤門)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내일 재궁(梓宮)을 예문관(藝文館)으로 모신다고 하는데, 어찌 곧바로 자정전(資政殿)에 봉안하지 않고 먼저 이곳으로 모시는가?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도감 낭청 서일보(徐日輔)는 집사로 들어가 참여토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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