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8[01] 약원이 구전으로 달하여 죽을 들기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 구전으로 달하기를,
“밤 사이에 체후가 어떠하십니까? 신들이 우려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이에 감히 죽을 올리니 슬픔을 억제하고 억지로라도 드시도록 하소서. 중궁전과 혜빈궁에도 올려서 보살펴 드리는 정성을 다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망극하다. 중궁전과 혜빈궁에 미음을 드시도록 권하겠다.”
하였다.
00-03-08[02] 원의(院議)로 달하여 사위(嗣位)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도승지 서유린(徐有隣), 좌승지 채홍리(蔡弘履), 우승지 서유경(徐有慶), 좌부승지 오재소(吳載紹), 우부승지 김문순(金文淳), 동부승지 이양정(李養鼎)이다.
○ 원의로 달하기를,
“왕통(王統)을 계승하는 것은 국가를 보존하기 위한 중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벌써 3일이 지났고 여덟 번을 아뢰었는데, 성의가 천박하여 아직도 유음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나라 안에 신하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삼가 청컨대 속히 윤허를 내리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 재차 달하여, 답하기를,
“이미 정청(庭請)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00-03-08[03]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달하여 사위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영중추부사 김상복(金相福), 판중추부사 김양택(金陽澤)ㆍ한익모(韓翼謨),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좌의정 신회(申晦), 우의정 이은(李溵)이다.
○ 김상복 등이 달하기를,
“신들이 전후로 청한 것이 이미 여덟 번에 이르렀습니다만, 한 번도 유음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저하께서는 어찌 천위(天位)는 잠시라도 비워둘 수 없으며, 국사(國事)는 잠깐이라도 공백 상태로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속히 마음을 돌리시어 군신(群臣)들의 청에 따르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가슴이 무너지는 듯할 뿐이다.”
하였다.
○ 재차 달하여, 답하기를,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는 마음이 더욱 망극하다.”
하였다.
00-03-08[04] 양사가 합사로 달하여 사위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대사헌 조재준(趙載俊), 대사간 이석재(李碩載), 집의 김낙수(金樂洙), 장령 신흔(申昕)ㆍ이창한(李昌漢), 지평 심기태(沈基泰), 헌납 이평(李枰)이다.
○ 합사하여 달하기를,
“상중(喪中)에 거하는 것과 면복(冕服)을 입는 일은 원래 병행해야 할 일이며, 대통(大統)을 이어받고 어려운 국사를 계승하는 일은 시급히 받들어야 할 책임입니다. 어버이를 그리는 애통함을 애써 억제하시고 속히 응당 행해야 할 예를 따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미 정청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 재차 달하여,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 세 번째 달하여, 답하기를,
“이미 정청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00-03-08[05] 대신이 중궁전의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왕세손이 사위하도록 권면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구전으로 아뢰기를,
“국가에는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 없는데 왕세손이 망극한 마음으로 아직도 온 나라의 청을 윤허하지 않고 계십니다. 삼가 청컨대, 종묘 사직의 막중함을 깊이 진념하시어 마음을 돌리도록 권면하는 도에 최선을 다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애통함을 당하였는데, 오늘 계사(啓辭)를 보니 더욱 망극하다. 망극한 가운데 종묘 사직의 위임이 더욱 시급하다. 세손이 슬픔이 과도하여 애써 따르지 않는다고 하니, 심정이야 비록 그렇겠지만 열성조를 계승하는 일을 어길 수는 없는 것이다. 경들의 계사가 이러하니, 안에서 마땅히 면유(勉諭)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00-03-08[06] 옥당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사위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교리 정우순(鄭宇淳), 부교리 박천형(朴天衡)ㆍ조상진(趙尙鎭), 수찬 윤동만(尹東晚)ㆍ김치현(金致顯), 부수찬 윤행수(尹行修)이다.
○ 차자의 대략에,
“우리 저하께서 왕통을 계승하는 큰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시어 지극히 중대한 거조가 이로 인해 날짜가 허비되고 시기가 지체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대행 대왕의 영혼이 하늘에서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삼가 청컨대, 애써 따르시어 윤허를 내리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미 정신(庭臣)에게 유시하였다.”
하였다.
○ 재차 차자를 올려, 답하기를,
“이미 정청(庭請)의 비답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00-03-08[07] 대신이 세 번째 달하여 사위를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 세 번째 달하기를,
“오늘날의 국사를 보면 날이 갈수록 더욱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합문 밖에 나아가서 자성(慈聖)께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비교(批敎)의 내용을 읽어 보고, 더욱 저도 모르게 실성(失聲)하여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하께서도 필시 들으셨을 터인데, 저하께서는 어찌 애통한 사정(私情) 때문에 지극히 막중한 종묘 사직의 위임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삼가 청컨대, 속히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자전(慈殿)의 하교를 우러러 받들고 또 신민들의 뜻을 따라서 부득이 윤허하겠다마는, 망극하고 망극하다.”
하였다.
00-03-08[08] 원상 김상철(金尙喆), 총호사 신회(申晦), 예조 판서 조중회(趙重晦)를 집경당(集慶堂)에서 인접하였다.
○ 김상철이 아뢰기를,
“조금 전에 비지를 받들었는데 윤허를 내리셨으니, 종묘 사직의 다행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여, 내가 울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내가 차마 따를 수 있는 일이겠는가마는, 비단 경들의 간청이 멈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전의 하교도 정녕하고 간절하기 때문에 오늘 내린 비답에서 부득이 윤허한 것이다. 애통하고 절박한 마음이 일마다 더욱 간절하다.”
하였다. 예조 판서 조중회가 아뢰기를,
“중궁전의 칭호를 응당 대왕대비전으로 할 것입니까?”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우선 전례(典禮)가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이미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계승하였으니 효장묘(孝章廟)를 추숭(追崇)하기 전에는 왕대비로 칭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하였다. 조중회가 아뢰기를,
“앞으로 효장묘를 추숭한 뒤에 비로소 대왕대비로 칭해야 한다면 자세히 헤아려서 품정(稟定)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김상철이 아뢰기를,
“신들이 《일기(日記)》를 참고해 보니, 인묘(仁廟)가 등극한 후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칭호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전례(典禮)입니다. 이번 칭호도 다를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이러한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배가 된다. 이처럼 슬프고 경황없는 중이라 전례가 어떠한지 알 수 없다마는 막중한 일은 널리 물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들은 백관을 거느리고 수의(收議)하여 저녁때에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철이 아뢰기를,
“신들이 백관에게 수의한 결과 모두 지금은 우선 왕대비전으로 칭하는 것이 예의(禮意)에 부합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는 마침 인묘의 고사(故事)를 본 것이 있어서 와서 아뢴 것이었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장릉(長陵 인조(仁朝)의 능호(陵號))의 고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마는, 추숭하기 전에는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계승하는 의의가 있으니, 먼저 왕대비전으로 칭호하고 추숭한 뒤에 대왕대비전으로 개칭(改稱)함으로써 대조(大朝)께서 칭호를 추가하여 계통을 정하신 뜻을 체득한다면 정례(情禮)가 구비될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의 사견으로 억단(臆斷)할 일이 아니니, 다시 수의(收議)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후에 내가 승지 서유린(徐有隣)에게 이르기를,
“이번 수의는 마땅히 군신(群臣)들의 말을 널리 채택해야 할 것이다.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도 수의해 오고 싶은데, 너무 늦어지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오늘 수의는 각사(各司)가 널리 상고하여 내일 와서 모이도록 하고,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는 예관을 파견하여 속히 가서 문의(問議)하여 회달(回達)하게 하라.”
하였다.
[주-D001] 효장묘(孝章廟) : 영조(英祖)의 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른다. 그는 영조 1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 뒤 정조(正祖)가 세손(世孫)으로 책봉되었을 때 이 효장세자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므로 정조 즉위 후 진종(眞宗)으로 추존(追尊)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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