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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일상다반사

정조의 일기 '일성록' 정조 즉위년 병신(1776) 3월 4일(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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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04[01] 시탕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00-03-04[02] 내가 흥태문(興泰門)의 막차에 나아가, 황단(皇壇)의 춘향(春享)에 쓸 향축(香祝)에 친히 어휘(御諱)를 써 넣고 이어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 익선관과 곤룡포를 착용하고 걸어서 금재문(今在門)으로 나가 흥태문의 막차에 좌정하였다. 승지 서유경(徐有慶)이 준비한 축문을 읽고 나서 내가 친히 어휘를 써 넣었다. 향실 관원이 향축을 받들고 나갔다. 내가 이르기를,

“근래에 문풍(文風)이 싹 사라졌다. 이번 과거에 혹시 볼 만한 자가 있던가?”

하니, 우의정 이은이 아뢰기를,

“문풍의 진작 여부는 전적으로 위에서 인도하여 솔선수범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문관(文官)이 만약 문(文)을 숭상하지 않아 의리(義理)에 밝지 못하면 국가는 저절로 망하는 것이다. 나는 문풍을 진작시키는 방도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다. 대개 호당(湖堂)의 선발은 실로 문사(文士)들을 분발시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연전에 선발한 자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 걸맞지 않으니 한심하지 않은가.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리에 있어 불가불 다시 잘 선발해야 할 것이니, 거둥한 뒤에 문형(文衡)은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예문관 응교도 문을 숭상하는 데 일조가 되는 자리인데, 그 관직을 폐기하여 방치한 지가 이미 백여 년이 되었다. 진작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다시 복구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이조 판서 서명선이 아뢰기를,

“문을 숭상하는 교화에 대하여 조정이나 초야에서 바야흐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복구하신다면 참으로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중묘(中廟) 병신년(1536, 중종31)에 처음 호당을 선발하였는데, 금년에 또 선발한다면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니, 이은이 아뢰기를,

“연기(年紀)가 우연히 일치하였으니, 더욱 빛이 납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예문관 응교는 호당을 선발한 후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00-03-04[03] 조운선(漕運船)을 호송(護送)하는 것에 대해 신칙하였다.

○ 우의정 이은이 달(達)하기를,

“조운선이 올라올 때에 호송과 길 안내 등의 일은 기호(畿湖)의 연해 지역 읍을 다시 더욱 엄하게 신칙하여 한결같이 양남(兩南)의 예에 의거하여 착실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하였다.

00-03-04[04] 관동(關東) 외의 이미 복명(復命)한 어사들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라고 영하였다.

○ 우의정 이은이 달하기를,

“이번에 제도(諸道)의 찰민은사(察民隱使)가 도내를 두루 순행하여 가보지 않은 읍이 없었지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포폄(褒貶)과 출척(黜陟)에 관하여 주달하면서 애초부터 수령들의 치읍(治邑) 여부에 관한 언급이 없었으니, 비록 지나간 일이기는 하지만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관동 어사는 비록 몇몇 읍이긴 하지만 논열(論列)한 것이 있으니, 그 외의 이미 복명한 어사들은 모두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하였다.

00-03-04[05] 서울과 외방에 관곡(官穀)을 유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폐단에 대해 신칙하였다.

○ 우의정 이은이 달하기를,

“대체로 관곡을 유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일은 실로 백성을 병들게 하는 큰일입니다. 서울의 각 군문(軍門)과 외방의 각 영읍(營邑)에 전후로 내린 조령(朝令)이 엄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점점 오래되다 보니 매번 해이해지는 폐단이 있습니다. 다시 엄한 신칙을 내리소서. 그래도 또 범법 행위를 하는 자가 있으면 무거운 형률을 적용하여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신칙하소서. 군문(軍門)의 무미(貿米)의 경우에는 응당 써야 할 지방(支放)이 부족할 때에만 하되 묘당으로 하여금 알게 하고 그 외에는 모두 금단하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하였다.

00-03-04[06] 벌목(伐木) 금지령이 해이해진 폐단에 대해 신칙하였다.

○ 우의정 이은이 달하기를,

“각처의 봉산(封山)이 날이 갈수록 민둥산이 되고 있으니 더욱 한심합니다. 각 해도를 신칙하여 각별히 적간(摘奸)하도록 해서 전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하였다.

00-03-04[07] 강계(江界)의 삼값[蔘價]과 환곡(還穀)의 폐단을 바로잡도록 영하였다.

○ 호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달하기를,

“관서 어사(關西御史)의 서계(書啓)를 비국에 내린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회계(回啓)하지 않고 있습니다. 강계의 삼값이 치솟아 한 돈 값이 10여 냥으로 올랐는데, 조정에서 확정하여 지급해 준 값은 4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강계 지역의 백성들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전에는 2만여 호나 되던 것이 지금은 7천 호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계의 환곡이 가장 많은데다 해마다 모곡(耗穀)이 증가하여 장차 수천만 석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폐단은 삼 때문에 발생한 폐단보다 더욱 심합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대대적으로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청컨대,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였다. 내가 대신에게 물으니, 우의정 이은이 아뢰기를,

“다른 도는 삼값을 이미 더 지급해 준 예가 있는데 유독 강계 지역의 백성들에게만 예전 가격으로 책정하는 것은 매우 안된 일입니다. 만약 그 모곡(耗穀)을 덜어다가 삼값을 더 지급해 준다면 민폐(民弊)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호조 판서가 주달한 것이 참으로 합당합니다.”

하였다. 내가 비당(備堂)에 물으니, 인양군(仁陽君) 이경호(李景祜)와 사직(司直) 구선복(具善復) 등이 아뢰기를,

“근래 들어 캐내는 삼이 점점 희귀하니 만약 그 값을 더 지급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반드시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호조 판서가 주달한 것이 폐단을 줄일 수 있는 대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임 부사는 재상의 반열에서 차출한 지 지금 1주년이 되었습니다만 백성들의 애환을 보살펴 주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특별히 간택하여 보낸 뜻이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대대적으로 변통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사람도 그대로이고 정책도 여전하다면 어떻게 민폐를 줄이고 은혜로운 정책을 펼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청렴한 사람을 뽑아서 보낸다면 폐단을 바로잡는 정책에 있어서 유익한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우상과 영상이 서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00-03-04[08] 대사헌 조재준(趙載俊), 집의 김낙수(金樂洙), 장령 이창한(李昌漢) 등이 피혐(避嫌)하여 체직을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 조재준 등이 피혐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소령(召令)을 여러 번 어겼으니, 그 죄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비록 대각(臺閣)을 대우하시는 뜻으로 벌(罰)이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는 데에 그쳤습니다만, 신들이 자처(自處)하는 의리로 볼 때 풍헌(風憲)의 직임에 있으면서 추고의 죄를 진 채 공무를 행하는 것은 청렴한 의리에 크게 관계되니, 어찌 감히 대차(臺次)에서 태연히 버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도록 영하소서.”

하여,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00-03-04[09] 정사가 있었다. 이조 판서 서명선(徐命善)과 참의 홍검(洪檢)이 나왔다.

○ 정이환(鄭履煥)을 예문관 응교로, 홍언철(洪彦喆)을 사간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지평으로, 심상현(沈相賢)ㆍ김치신(金致信)을 정언으로, 박지원(朴知源)을 돈녕부 참봉으로, 이영원(李英遠)을 헌릉 참봉으로 삼았다. - 박지원 이하는 모두 초사(初仕)이다.

00-03-04[10] 상이 집경당(集慶堂)에 계시었다. 청대(請對)한 신하들을 소견(召見)하는 자리에 내가 시좌하였다.

○ 상의 혼미한 증세가 또 나타나 마치 취침할 때와 같았다. 목구멍 사이에 약간의 담이 끓는 소리가 있고 숨결이 가빠 평안하지 못하였다. 내가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울면서 우의정 이은에게 이르기를,

“요즘 성상의 체후가 이러하다. 오랜 시간 절박한 가운데 담이 끓고 혼미한 증세가 더욱 악화되더니 천식기가 또 이러하다. 그리고 헛소리를 하는 등의 증세가 수시로 보이니, 이제는 손쓸 방도가 없다. 헛소리하는 증세가 조금 잠잠해지면 비몽사몽한 상태로 반나절을 넘기기도 하고 혹은 두어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데, 이런 때에는 비록 다음(茶飮)과 같은 것도 올리기가 어렵다. 오늘은 경들이 마침 입시하여 우러러보게 되었으니 의관더러 앞으로 나와서 진찰하게 하라.”

하여, 이은이 진찰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이르기를,

“이러한 때에는 비록 대내에서 기침(起寢)하기를 억지로 청하더라도 승낙을 받지 못한다. 다만 목구멍에서 담이 끓는 소리만 심할 뿐이니, 체후를 여쭙기가 매우 송구하고 민망하다.”

하였다.

00-03-04[11] 승지 서유린(徐有隣)을 존현각(尊賢閣)에서 불러 접견하였다.

○ 서유린이 아뢰기를,

“내일 거둥할 때에 탕제(湯劑)를 달여서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환궁한 뒤에 달여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경은 말망(末望)으로 제조(提調)가 되었다.”

하니, 서유린이 아뢰기를,

“이 한몸 모두는 성상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내일 입시할 때에 비록 좌직(坐直)이 입시하더라도 경은 꼭 따라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머리가 푸른 오리를 구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겨우 두 마리를 구하였습니다.”

하였다.

00-03-04[12] 상이 집경당에 계시었다. 승지 서유린을 불러 접견하는 자리에 내가 시좌하였다.

○ 상이 한동안 하교 없이 있다가 단지 중관(中官)에게 묻기를,

“들어오는 시간이 어찌 이리 오래 걸리는가?”

하자, 서유린이 아뢰기를,

“신들은 들어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유시(酉時)’라는 글자를 쓰라고 명하였으나, 서유린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내가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서유린에게 이르기를,

“전교를 쓰라고 명한 것은 아닌 듯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오늘 성상의 체후가 악화된 가운데 해가 저문 후부터는 더욱 심하여 혼미한 기후가 이러하니, 어찌할 수는 없고 마음만 탄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이러한 때에는 번거로움과 시끄러움을 피하지 않고 반드시 아뢰는 소리가 있어야만 졸리는 듯한 상태를 조금은 이길 수 있을 것이니, 경이 다시 초지(草紙)를 뽑아 기다리고 있다는 뜻으로 주달하라.”

하였다. 내가 또 곁에서 어수(御手)를 안마하면서 헛기침을 하자, 얼마 있다가 상이 이르기를,

“인정(人定)이 이미 지났는가?”

하니, 중관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승지가 들어와 있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무엇하러 들어왔단 말인가?”

하였다. 서유린이 아뢰기를,

“초지를 뽑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정신이 이렇다.”

하고, 쓰라고 명하고 무어라고 전교하였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서유린이 공사(公事)를 읽자, 상이 또 쓰라고 명하고 두어 줄 전교하였으나 헛소리로 한 전교인 듯했다. 서유린이 읽고 나서 아뢰기를,

“전교의 말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감히 반포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내가 아뢰기를,

“지금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다시 시끄럽게 아뢰기가 어렵다.”

하고, 우선 물러가겠다는 뜻을 아뢰었으나 상은 역시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내가 이르기를,

“요즘 증세가 매일 이러하니, 신중히 하는 도리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 근일의 예대로 탕제를 지어 내다가 즉시 달여서 대령하도록 하되, 입시(入侍)하는 것이나 달여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나 간에 간편하게 대령하라.”

하였다.

00-03-04[13] 상이 집경당에 계시었다. 약원이 입진을 행하는 자리에 내가 시좌하였다.

○ 내가 약원 제조 서유린에게 이르기를,

“요즘 증세가 자꾸만 악화되어 매일 손쓸 길이 없는데 저녁 이후에는 담이 끓고 혼미한 증후가 더욱 심해졌다. 눈꺼풀을 떴다 감았다 하시는 것과 손끝 발끝의 온기가 평상시와는 달랐다. 그러므로 기후를 진찰할 것을 앙청(仰請)하였으나 아무런 지시가 없었고, 탕제를 올릴 것을 앙청하였으나 역시 아무런 지시가 없으셨다. 얼마 후에 손의 한기가 더욱 심해지기에 계귤차(桂橘茶)를 두어 숟가락 올려 보았더니, 온기가 있는 듯하다가 도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지금 바로 진찰하겠다고 주달하였다. 탕제는 달여서 대령하였는가?”

하니, 서유린이 아뢰기를,

“달여서 대령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오도형(吳道炯)에게 진찰하게 하였더니, 오도형이 진찰한 뒤에 주달하기를,

“맥박이 조금 줄었는데 이것은 필시 담기(痰氣)가 정체(停滯)되어서 그럴 것입니다. 백비탕(白沸湯)을 우선 진어하고 계귤차에다 곽향(藿香) 1전(錢)을 첨가하여 달여서 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상을 부축하여 수저로 백비탕을 떠서 올렸다. 상이 잠시 후에 돌아눕고자 하기에 내가 부축하여 돌아 눕혀 드렸다. 옥음이 희미하게 들렸는데 떨리는 기운이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다음(茶飮)을 가져왔는가?”

하였는데, 서유린 등이 미처 알아듣지 못하였다. 내가 서유린에게 이르기를,

“다음을 달여 가지고 왔느냐는 분부인 듯하다. 다음을 속히 달여 가지고 오라. 도제조와 제조가 만일 대궐에 있거든 속히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도제조 김상복(金相福)과 제조 박상덕(朴相德)이 입시하여 다음을 올렸다. 상이 다음을 드시고 나서는 이윽고 가래침과 다음을 토하였다. 내가 울먹이면서 타는 듯한 마음으로 잇달아 의관더러 진찰을 하게하고, 오도형에게 이르기를,

“지금 손끝이 차갑기가 더욱 심하니, 어쩌면 좋겠는가?”

하니, 오도형이 아뢰기를,

“기도(氣度)가 제대로 돌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취침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담이 끓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도형이 진찰을 하고 나서 아뢰기를,

“맥박은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지금은 달리 진어할 만한 약이 없고, 한 돈쭝 속미음(粟米飮)을 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기에, 속미음을 속히 달여서 들여오게 하였다. 내가 여러 승지와 시임 대신, 원임 대신을 입시하도록 영하고, 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과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정후겸(鄭厚謙), 김효대(金孝大), 김한기(金漢耆), 김한로(金漢老)를 입시하도록 영하였다. 살피고 나서 신하들이 아뢰기를,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00-03-04[14] 종묘 사직과 산천에 기도를 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00-03-04[15] 상이 대보(大寶)를 왕세손(王世孫)에게 전하라고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00-03-04[16] 상이 위독하시었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00-03-04[17] 궁성(宮城)을 호위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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