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즉위년 병신(1776) 3월 1일(임신)
00-03-01[01] 비가 내렸다.
○ 밤 5경에 측우기(測雨器)의 수심(水深)은 3푼이었다.
00-03-01[02] 시탕(侍湯)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0-03-01[03]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설행(設行)하였는데, 내가 시좌(侍坐)하였다.
○ 내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착용하고 걸어서 금재문(今在門)으로 나가 여(輿)를 탔다. 광달문(廣達門)을 경유하여 숭정문(崇政門)으로 들어가서 동쪽 월랑(月廊)에 나아가 막차에 들었다.
○ 내가 이르기를,
“식년시(式年試)의 경우 전에는 합고(合考)할 적에 간략하게 하였다.”
하니, 대제학 이휘지(李徽之)가 아뢰기를,
“신이 명관(命官)과 함께 상의하여 간소하게 뽑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축문(祝文)을 다 지었는가?”
하니, 이휘지가 아뢰기를,
“벌써 지어 두었습니다마는 아직 정서(正書)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잠시 후에 여를 타고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00-03-01[04] 시관(試官) 및 도승지를 패초(牌招)하라고 영(令 대리 청정하는 세자나 세손의 명(命)을 이르는 말)하였다.
○ 영(令)하기를,
“지금 과장(科場)을 설치할 것이니, 개양문(開陽門)을 닫지 말고, 시관을 패초하라.”
하였다. 또 영하기를,
“이제 성문이 열릴 시각이니, 도승지를 패초하여 사은(謝恩)하도록 하라.”
하였다.
00-03-01[05] 영상(領相)과 좌상(左相)은 입대(入對)하라고 영하였다.
○ 영하기를,
“승지가 입대할 때에 영상도 함께 입대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영하기를,
“영상과 좌상이 입대하도록 사관을 보내어 유시(諭示)하라.”
하였다.
00-03-01[06] 영상 김상철(金尙喆)과 승지 서유경(徐有慶)을 존현각(尊賢閣)에서 인접(引接)하였다.
○ 김상철이 아뢰기를,
“대조(大朝 세자나 세손이 대리 청정할 때의 임금을 이르는 말)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어제 오늘 손절(損節)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과장(科場)을 철회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그러나 처음부터 과장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이미 과장을 설치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이고서 곧바로 또 철파한다면 이는 팔방(八方)의 선비들을 기만하는 처사이니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닌가.”
하니, 김상철이 아뢰기를,
“이 하교(下敎)를 반포하시고 갑자기 과장을 철회하시는 것은 선비들만 억울할 뿐이 아닙니다. 조정의 정령(政令)으로 보아도 그 체면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승지는 어찌 즉시 대조에 청대(請對)하지 않는가?”
하니, 승지 서유경이 아뢰기를,
“대신이 들어오거든 상의한 뒤에 청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 지체하고 있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승지는 나가서 대신과 함께 즉시 청대를 요청하도록 하라.”
하였다.
00-03-01[07] 영상과 예조 판서가 입시하는 자리에 내가 시좌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00-03-01[08] 과차(科次) 인원이 입시하는 자리에 내가 시좌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00-03-01[09] 승지 김문순(金文淳)을 불러 존현각에서 접견하였다.
○ 대보단(大報壇)의 제문을 읽도록 하였다. 다 읽자, 내가 이르기를,
“신대익(申大益)은 누구인가?”
하니, 김문순이 아뢰기를,
“항렬(行列)로 보면 신대손(申大孫)의 혈족(血族)인 듯합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문형(文衡)이 지어 올린 글은 자못 우수하고 작품도 많으니, 매우 기특하다.”
하였다.
00-03-01[10] 헌납 이평(李枰)이 피혐(避嫌)하여 체직을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 피혐한 글의 대략에,
“신이 지난겨울 이후로 대각(臺閣)에 한 걸음도 억지로 나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되었기에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삼가 보건대, 홍술해(洪述海)를 방송(放送)하라는 영지(令旨)는 실로 상격(常格)에 위배됩니다. 홍술해가 지방(支放)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칙사(勅使) 접대 명목의 비용을 가져다가 쌀을 사서 이익을 불렸고, 편비(褊裨)가 어사(御史)를 기만하여, 이미 발송한 장문(狀聞)을 잡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기 때문에 본도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기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답을 받고 보니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는 혐의에 관계되므로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어찌 감히 대차(臺次)에서 태연히 버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어제 상소에 대한 비답은 신칙한 것에 불과하다. 오늘 인피(引避)한 내용은 대관(臺官)의 체모를 크게 지켰으니, 한때 살피지 못한 잘못이야 무엇이 그리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서 물론(物論)을 기다리지도 말라.”
하였다.
00-03-01[11] 어사 임희우(任希雨)를 잡아다 심문하여 처리하고, 편비도 이름을 물어서 잡아다 가두라고 영하였다.
○ 영하기를,
“헌납 이평(李枰)이 피혐한 상소의 내용을 들으니, 그 탐오(貪汚)를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 결코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선 본도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여 즉시 장문(狀聞)을 올리도록 하라. 이른바 장계를 어사가 이미 봉(封)하였다가 바로 중지했다는 것은 직무를 태만히 한 것으로서 언급할 것도 없거니와 편비가 기만하여 잡아 두었다는 것은 국법으로 비추어 보면 더욱 형편없다. 여기에서 법(法)을 무시한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어사 임희우를 잡아다 심문하여 처리하고 당해 편비는 해부로 하여금 이름을 물어서 잡아들여 가둔 후에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영하기를,
“얼마 전에 본도에 조사하라는 영을 내렸다마는, 도내 수령이 모두 일찍이 그의 관할 하에 있었고 해도의 감사도 임무를 교대한 사람이니, 그들이 사실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 엄명(嚴明)하게 할 것인지를 보장하기 어렵다. 종당에는 어사를 가려 보내서 근만(勤慢)을 염탐하여 만일 발각이 되면 마땅히 전 감사와 같은 율로 논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황해 감사를 신칙하고 똑같은 뜻으로 의금부(義禁府)에도 분부하라.”
하였다.
00-03-01[12] 의금부 도사 신태익(申泰益)을 태거(汰去)하였다.
○ 의금부가 달(達 대리 청정하는 세자나 세손에게 신하가 아뢰는 것을 이르는 말)하기를,
“임희우에게 당해 편비의 이름을 물었더니, 본부 무도사(武都事) 신대익(申大益)이라고 합니다. 즉시 잡아들여 가두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영하기를,
“도사(都事)를 우선 태거(汰去)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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